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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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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서양을 향한 질주와 제동 === 하지만 이런 전과에 대해 독일군 장군단 내부는 심각한 노선 대립으로 곪아들어가고 있었다. 이는 전통주의자와 혁신주의자간 갈등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과거의 선형 전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였다. 전통주의자들에게 기갑부대가 고속으로 적 후방을 향해 진격하는 것은 측방을 그대로 노출하는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기갑부대가 보병부대에 의해 연결된 선형 전선 없이 종심지역까지 깊숙한 돌파구를 만들어놓은 상태는 측방에 위치한적의 역습으로 오히려 돌파 제대가 역포위당하기 너무나 좋은 최악의 형태였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갑부대의 진격은 보병부대의 보조에 맞추어 연결된 선형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데리안을 위시한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기갑부대에게 측방 노출은 가장 유리한 상황을 의미한다. 그것이 길면 길수록 더 유리하다'[* 이 발언이 상정하는 상황을 해석하면 곧 기갑부대가 더욱 길게 측면을 노출하게 된다는 것은 적의 방어선을 돌파해 더욱 깊게 진격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후 독일군의 기갑부대가 공세적 상황에서는 적의 방어선을 뚫고, 깊게 침투한 다음 포위망을 형성해 섬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에게 있어 더 깊은 돌파는 곧 더 큰 포위망을, 나아가 더 큰 섬멸 전과를 의미했던 것이다.]를 견지했다. 5월 17일, 결국 이 갈등이 폭발한 것이 구데리안이 일시적으로 19기갑군단장 자리에서 해임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보기 이전에,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클라이스트는 이번 전역동안 구데리안같은 혁신주의자와 보수적인 독일 장교단 사이의 중재자였다. [[클라이스트]]는 귀족 태생의 기병장교 출신 인물으로, 기병은 전통적인 프로이센 귀족 군인 계급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병과였다. 그리고 구 프로이센 귀족 장교들은 이 기병병과를 중심으로 형성된 독일군의 중추 파벌 중 하나로 전통주의자를 대표하는 집단이었다. 실제로 1930년대 후반 즈음 기갑사단 대신 경사단(Leichte Division)이라고 하는 차량화된 기병사단 비슷한 것이 창설된 것 역시 보수적인 프로이센 귀족 장교들과의 정치적 타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클라이스트가 사령관으로 있었기에 그나마 기갑집단이라도 창설될 수 있던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동시에 클라이스트는 새로운 교리인 기동/기갑전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이해도를 가진 인물로 보인다. 구데리안은 클라이스트의 역량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독소전쟁]]에서 보인 클라이스트의 전과는 그의 군재가 결코 범상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클라이스트는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이 포위당한 상황에서 A집단군 전체를 성공적으로 탈출시켰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제6군과 함께 저승길 동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1942년 겨울 우크라이나 독일 점령지를 유린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 군사적으로도 클라이스트는 보수적인 귀족 장교층과 새로이 등장한 소장파 기갑 장교들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문제는 구데리안이 지나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클라이스트가 조율할 수 있는 한계 너머까지 치닫고 있었다. 심지어 클라이스트가 하달한 전진 가능 범위 너머까지 구데리안이 이미 진격해 있는 경우가 발생하기까지 하면서 결국 클라이스트와 구데리안 사이에서도 갈등이 팽배하게 되었고, 클라이스트가 일시적으로 구데리안를 직위해제시키는 결과에 이르렀다. 이는 12군 사령관 리스트가 직접 둘 사이를 중재하여 일단락된다. 5월 17일~18일, 이틀간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사실상 진격을 중단한다. 이 제동의 원인은 보수적 독일 장교단에 의한 것이 아닌,[* 12군 사령관 리스트나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가 구데리안으로 대표되는 기갑부대의 고속 전진을 달갑게 여겼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있었다. 한창 작전이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와중 히틀러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기갑집단에 정지를 명령한다. 이는 A집단군의 엄청난 고속 진격, 측방 차장을 신경쓰지 않는 기갑부대와 본인이 전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에 기인한 것으로 할더는 추측했다. 5월 18일 히틀러가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보낸 편지의 '1914년의 마른 기적이 더 이상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오!'라는 문구에서 이런 위기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과거 1914년 독일군은 국경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하며 빠르게 파리로 접근했지만 프랑스가 모든 교통수단을 동원해 마른 강에서 독일군 주력군을 격파하며 전선을 고착화 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1차 대전 참전자 출신이었던 히틀러가 할더의 말마따라 오히려 강력한 보병 방어선을 구축하여 기갑군단을 막아내게 될 경우 전선이 고착화 될 것을 과할 정도로 걱정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답답해진 것은 할더였다. 할더는 기존의 소극적 태도를 벗어던진 채 만슈타인보다 더 만슈타인다운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전술했듯이 할더는 작전 계획에 있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타입의 전형적인 참모부 장교지 룬트슈테트, 보크 등과 같은 보수파 장교는 아니었다. 만슈타인의 계획안에 대해 그가 가졌던 의문 부호와 불안점들은 해소된 상황에서 그는 공황상태가 온 프랑스군을 더 많이 더 신속하게 포위 격멸하는 계획을 세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대서양 지역에 대한 포위망은 정지한 B집단군과 일부 기갑부대만으로 형성하고, A집단군의 정예부대가 엔 강과 솜 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하려 하는 연합군을 포위, 대서양과 남측방 일대에서 동시에 포위망을 펼쳐 일거에 연합군을 격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거의 신경쇠약 상태로 이 계획마저 강력하게 거부했다. 결국 남측방 일대를 공세적으로 방호한다는 만슈타인의 구상은 구데리안 기갑군단에게서 잠깐 꽃을 피우려 하다가 히틀러에 의해 채 피기도 전에 꺾였다. 히틀러는 더 나아가 총참모부의 전권을 박탈하고는 남측방 일대에 2군, 4군, 12군을 투입하여 방어선 형성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공황 상태에 빠진 연합군이 해당 방면으로 역습을 걸어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이는 당시 연합국 주요 인물들의 반응을 보면 명확해진다. 북동부전선 사령관 조르주는 5월 14일 스당 돌파 소식을 듣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그 날 저녁 프랑스 수상 레노는 [[윈스턴 처칠]]에게 스당이 돌파되었으며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처칠과의 통화에서 레노는 '우리가 당했습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라고 선언했을 정도. 그리고 15일 저녁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패전과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을 선언했다. 유일한 전략 예비대였던 7군이 딜 방어선에 투입되면서 A집단군을 막을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와중에 그 유명한 [[샤를 드골]]의 역습이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4흉갑기병사단이 받은 최초 임무는 엔 강 유역에서의 방어선 구축이었지만, 드골은 과감한 역습으로 독일군의 후위인 몽코르네 지점을 정확히 찌를 수 있었다. 4흉갑기병사단은 기존의 [[프랑스군]]이 보여 온 운용 방식과 대치되는 고속/집중된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4흉갑기병사단은 무려 구데리안 사령부로부터 2km 떨어진 지점까지 돌파해들어왔다. 하지만 독일군의 대처는 신속했다. 드골의 역습을 보고받은 제 19기갑군단 군수참모였던 그라프 폰 킬만스에크 대위는 신속하게 후퇴 중인 병력들을 재정비하고 공병 중대로 하여금 지뢰를 매설하고 가용가능한 대전차 전력을 동원해 방어선을 구축한 이후 공군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결국 드골의 4흉갑기갑사단의 완편되지 못한 전력과 독일군의 기민한 대처로 인해 이 역습은 전술적인 차원에 그쳤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아쉽게 되었지만 독일 입장에서는 한숨을 돌린 드골의 역습을 일개 군단의 군수참모에 불과했던 대위가 군단 병력들을 지휘해 격퇴시킨 것은 독일군의 유연한 명령체계를 돋보이게 한다. 이는 [[프로이센 왕국군]] 시절 [[헬무트 폰 몰트케|대 몰트케]]로부터 이어진 타 군에 비해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은 독일군 참모부의 전통이있기 때문에 가능했다.독일 육군 특성상 대위 계급이라 해도 군단 참모라는 직책 그것도 [[일반참모]] 교육 수료자면 급할 경우 군단장 명의로 명령문을 선발송하고 사후 승인받는 것도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 덕에 일개 대위가 군단의 병력을 신속하게 지휘하여 드골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 작전을 이끈 한낱 대위, 훗날 [[NATO]] 중부유럽군(AFCENT) 총사령관에 오르는 그라프 폰 킬만스에크는 드골이 이끄는 4흉갑기병사단의 역습에 대해 프랑스군의 유일한 '시간적, 공간적, 방향 면에서 완벽한 역습'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렇다고 드골의 작전이 한계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드골의 기동 작전은 공군과의 쌍방 협조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드골은 자신의 공격 계획을 프랑스 공군에게 통보하지 않았고 이러한 이유로 2일 후 그가 다시 벌인 기동작전이 독일공군의 신속한 대응으로 인해 이전과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초장에 저지되고 만다. 이는 그의 상대였던 독일군이 공군연락장교를 통해 육군과 공군간의 기민한 협조를 이끌어냈던 것과 비교된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 명령을 무시하고 미친듯이 진격하던 독일군 부대가 있었으니 바로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제7기갑사단이었다. 애당초 보병병과 출신이었던 에르빈 롬멜은 기갑부대에 대한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다. 본래 폴란드 침공 당시 에르빈 롬멜은 히틀러의 국방군 경호부대 소속이었지만 구데리안의 '전차를 주목하라!'에 크게 감명을 받고 히틀러에게 청원을 해서 제7 기갑사단장으로 부임했다. 당연히 낙하산 인사인만큼 초기 제7 기갑사단 참모들은 보병 병과 교관출신이 기갑부대에 적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으나 롬멜은 자신의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신속한 기동 전술[* 사실 롬멜은 본인이 저술한 교범에서 기동력을 매우 강조하는 등, 원래 기동전에 밝은 사람이었다.]에 구데리안의 기갑교리를 접목한다. 히틀러 정지 명령이 떨어진 상태에서 전면적인 진격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4군 사령관 클루게 상급대장은 역습 징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서쪽으로의 제한된 진격을 시도하기로 했다. 호트는 이 명령을 받고 7기갑사단에게 아벤 방면으로의 공세 명령[* 보다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 공세를 개시하라'는 작전명령이라기보단 '공세를 준비하라'는 명령에 가까웠다.]을 내렸다. 하지만 군단의 명령서가 도착했을 때 이미 롬멜은 휘하 전차부대만 대동한 채 아벤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여기서 롬멜은 한바탕 대대적인 활극을 펼친다. 16일 오전 공격을 강행한 7기갑사단은 그날 오후 101요새사단의 방어선을 분쇄했고 곧바로 2차 방어선까지 강력한 공세를 가해 돌파, 형성된 돌파구를 따라 종심 깊이 진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우연히 롬멜의 진격로 일대에 프랑스군 5차량화보병사단의 주력과 18보병사단/1흉갑기병사단의 잔존 병력 일부가 숙영지를 잡고 있었다. 7기갑사단은 프랑스군 숙영지를 완벽하게 유린하고 5월 17일 자정에 아벤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점에 1흉갑기병사단 최후의 전차 16대가 독일군 기갑부대와 혈전을 펼쳐 큰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13대의 전차를 상실하고 급히 퇴각했다.[* 1흉갑기병사단은 플라비용 전차전 종료 직후엔 40~50여대의 전차가 남아있었지만 후퇴과정에서 기능고장과 연료부족, 독일 공군의 공습으로 많은 수를 상실한 상태였다.] 롬멜은 서쪽으로 더욱 깊숙히 진격, 랑드르시(Landrecies)까지 진출해 상브르 강을 건널 수 있는 교량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5월 17일 새벽 6시 30분, 롬멜은 단 2개 대대만 동반한 채 상브르 강을 도하한 뒤 르카토 일대까지 진출한 상태에서 진격을 멈췄다. 롬멜이 상브르 강을 도하했을 무렵 후방에 남겨진 사단지휘소는 서식명령을 수령해 사단장에게 전달하려 했지만, 기이하게도 롬멜이 멈춰야 할 타이밍에 무선 교신이 연이어 끊기면서 이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결국 르카토(Le Cateau)에서 롬멜은 진격이 늦어지는 본대를 데려오기 위해 '''[[3호 전차]] 1대와 지휘장갑차'''만 동원해서 프랑스군 패잔병이 우글거리고 있을 동쪽을 통과하는 모험을 떠났다.[* 귀환 도중 3호 전차는 고장이 났다.] 이 와중에 롬멜은 퇴각하던 프랑스군들까지 포로로 잡고, 아벤(Avesnes)으로 진격하고 있던 사단 본대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프랑스군이 보인 작태는 그야말로 한심함 그자체였다. 롬멜이 전차를 몰고 와 '항복해라!'를 외치자 이렇다할 저항없이 항복해버렸다. 물론 프랑스군은 이미 독일군에게 유린당할대로 당한 상태였고 왠 독일군 장군이 전차를 끌고 나타나 항복을 요구하자 이미 자신들이 독일군 본대에 따라잡혔다고 착각했다. 프랑스군 입장에선 '''사단장이 본대도 없이 최소 호위 병력만 이끌고 적진 한가운데에 나타나는 비상식적인 미친 짓을 벌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 2일간 무려 80km를 돌파한 장대한 활극은 연장된 마지노 선으로 불리던 프랑스군 방어선 돌파구를 형성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졌다. 훗날 히틀러는 에르빈 롬멜을 만난 자리에서 롬멜이 활극을 펼치는 동안 잠을 설쳤다고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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